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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 지은이김동길 외 9인
  • 옮긴이
  • 출간일2017년 10월 2일
  • 쪽수448쪽
  • 제본형식무선
  • ISBN978-89-6523-680-1 03990
  • 정가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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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소개

■ 책 소개

이 선집(選集)의 제작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평생 대한국인 자존심의 정체와 그 지키기에 대해 생각하고 말해온 역사학자 김동길 교수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는 대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역사적 인물(세종대왕, 이순신, 사명당, 정약용, 이상재, 안중근, 안창호, 이승만, 백선엽, 현봉학, 박태준, 함석헌, 김수환, 전형필, 박경리) 열다섯 명을 가려 뽑아 그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최근 국내외 어지러운 사건들로 무너져내리는 국민으로 그리고 개인으로의 자존심 회복의 근거로, 자존심 확대 가능성의 큰 상징으로 새롭게 조명해보려 했다.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적어도 통일 신라 이후 민족 ‧ 국가 또는 국민 ‧ 국가의 맥을 이어왔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유사 이래 1천 회 가까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았고, 그 재앙이 국파(國破) 직전에 이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민족국가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선 기록적인 압축 성장에다 민주 정치까지 진척되어 세계적인 자랑이 되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세계에 우뚝 서고 오늘의 정체성 있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어질면서 의로운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가치 있다고 믿는 바 신념을 앞장서서 실천하고 행동해주었다. 그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인물들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대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들이었다.

그런 인물은 열다섯 명보다 훨씬 더 많이 꼽을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기록의 역사가 분명한 시대 이래를 염두에 두어 조선 왕조 이래의 인격을 가려 뽑았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은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인물마다 이미 전기물 또는 평전 등이 적잖이 출판된 바 있다. 그걸 참고하되 올해 구순인 김동길 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이 시대 문사 열 명(김동길 교수 포함)이 그간 그런 인물을 어떻게 알고 무엇을 배우려 했는지를 적어놓았다. 대상 인물들을 역사책으로 만난 필자가 대부분이지만, 현대에서 명멸했던 인물들의 경우 필자들이 직접 마주쳤던 생생한 체험도 담아놓았다.

 

 

■ 책 속으로

세종은 이웃 나라들을 침공하여 국토를 크게 넓힌다는 따위의 업적을 자랑하는 전쟁 영웅은 아니었다. 세종은 군사적 무훈이 혁혁한 대왕이 아니라 문치 내정에 찬란한 업적을 쌓아 올린 성군이었다. 이 점에선 위의 대왕들 반열에서 세종대왕에 비길만한 군왕은 거의 없다. 굳이 찾는다면 오직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을 들 수 있을 뿐이다. - 14쪽 ‘한글을 창제한 대왕 세종’ 중에서

 

어문학이면 어문학, 천문학이면 천문학, 음악이면 음악, 각 분야 하나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그 모두가 당시 세계 문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업적들이었다. 그 어느 한 분야의 업적만도 한 사람이, 또는 여러 사람이 전 생애를 걸쳐 헌신해야 비로소 이룩할 수 있는 정도의 대단한 경지였다. 그 모든 것을 한 시대의 한 군왕이 성취한 것이다. 그 점에서 세종대왕은 참으로 한반도의 ‘르네상스인’이었다. 그 덕분에 세종 시대를 15세기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 16쪽 ‘한글을 창제한 대왕 세종’ 중에서

 

지구상의 모든 다른 지역에서는 한 사람의 군왕이 지배하고 무력(武力)이 지배했던 고대 세계에서 국정(國政)이 시민에 의해서(by the people) 좌우되고 또 모든 결정이 ‘힘’이 아니라 ‘말’에 의해서 좌우되었다는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헬라스(그리스)의 기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모든 다른 지역에서 군주의 권력과 권위를 위해서 비밀의 보호와 유지가 추구되고, 지식을 독점했던 특권 계층이 지식 정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출판에 대한 갖가지 통제와 단속을 관행화하던 15세기에, 세종대왕이 오히려 모든 사람을 위하여(for the people)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글을 새로 만들고 백성들을 위하여 수많은 책을 펴내는 ‘민본 정치’를 구현했다는 사실은 ‘한반도의 기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 29쪽 ‘한글을 창제한 대왕 세종’ 중에서

 

동락의 연장으로 이순신은 지휘소 근처에 첩실(妾室)을 두지 않았다. 첩실을 둘 수 있었던 장관급 장군이었고 후임 통제사도 첩실을 두었지만 이순신은 그러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남녀유별의 시절이었던 만큼 부장들이 아무 때나 통제사를 찾아와 만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혹시 적의 소식을 듣거든 한밤중일지라도 즉시 비밀히 보고하되……”란 말도 헛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었다. “하급 병졸이라도 군사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면 와서 보고하도록 하여 부대 내의 사정을 훤히 파악하였다”라고 <징비록>도 감동했다. 이런 통솔 또는 리더십이라면 그 명장에 그만한 부장들이 없을 수 없었다. 진중에서 <송사(宋史)>를 읽고는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人臣事君 有死無貳)”라고 다짐하던 통제사 아래에서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바친다(見危授命)”라고 결의하던 부하들이 있었기에 연전연승이 가능했다. - 50쪽 ‘천 년의 인물, 이순신’ 중에서

 

왜국의 ‘문자속’들은 임란이 끝난 지 백년이 되던 17세기 말부터 이미 이순신에 대해 읽고 배우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활약상을 자세히 기록한 『징비록』이 무단히 흘러갔고, 거기서 일어판도 출간되었기 때문이었다. 『징비록』이 다루었던 임란 7년은 “류성룡의 이순신 천거, 이순신군(軍)의 승전, 이순신의 장렬한 전사” 세 부분이라 했을 정도였는데, 그들의 배움은 유명 역사소설가가 압축적으로 잘 정리해 놓았다. - 38쪽 ‘천 년의 인물, 이순신’ 중에서

충무공이 그랬다. 누란의 국난을 만나 결연히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켜냈다. 이 불멸의 대공을 돌이켜 볼 때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마다 나라와 민족을 지켜준 이를 ‘천 년의 인물’로 받들어왔던 세계사적 선례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 승리로 이끌었던 전시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을, 일본은 무혈로 바쿠후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던 ‘하급 무사’ 출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를 제 나라 ‘천 년의 인물’로 골라서 사랑을 넓혀왔다. 서기 2000년을 맞았을 때 새 천 년을 바라본다면서 여러 나라에서 지난 역사 천 년의 인물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우리도 그런 공론을 폈다면 충무공 이순신이야 말로 그 자리에 제일 먼저 꼽아야 마땅했다. - 66쪽 ‘천 년의 인물, 이순신’ 중에서

 

명분에 살고 죽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 승려의 지위는 하잘 것 없었다. 나라를 구한 승려라는 세평이 무색할 정도로 사명당 유정의 행적에 관한 조선 정부의 공적 기록은 극히 소략하다. 반면 민간 설화 속의 사명당은 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왜적의 혼을 제압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사명당에 얽힌 갖가지 도술과 일화들은 한 시대를 사심 없이 앞장서 간 위인에게 민중들이 바치는 애정의 헌사라는 점에서 도리어 ‘민중적 진실’의 일부를 이룬다는 해석도 있다. - 72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평양성의 탈환에 의승병의 공헌은 혁혁했다. 명의 도독 이여송(李如松)은 서산의 공을 찬양하는 시첩을 보냈다. 평양성 탈환에 이어 도제찰사 류성룡의 지휘 아래 관군과 의승병은 수도 한양의 탈환에 나섰다. 사명당 유정은 1593년 3월 26일 노원평 전투와 3월 27일 ‘수락산 대첩’에서 세운 공으로 일약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승장 유정의 군사들이 매우 정예로워서 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세웠기에 …… 당상관의 직을 제수하여 원근에 있는 승려들의 분발심을 선도하도록 하라”(『선조실록』 4월 21조). 이 사실을 기록한 사관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승려가 참획의 공을 세웠거늘, 이는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라며 나라의 녹봉을 받는 문무관의 자성을 촉구했다. - 84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선조실록 37년 2월 24일에는 “일개 승려를 국사로 파견하는 일”에 대한 사관의 탄식이 담겨 있다.

“묘당의 계책이 비루하다. 종묘사직은 원수를 갚지 못하고 하릴 없이 허송세월한다. 적의 사신을 한 번 만나자 서로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하찮은 승려의 손에 맡기고 있으니 …… 나랏일을 꾀할 자가 유정 한 사람뿐이니, 아 개탄할 일이다.”

어정쩡한 지위에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바다를 건너는 사명당 유정에게 많은 사람이 격려했다.

“성세에 명장은 많지만 기특한 공은 늙은 대사가 독차지했네.”

그 수많은 격문 중에 작가 불명의 절구가 단연 백미다.

“묘당에 삼정승 있다 떠벌이지 말라. 나라의 안위는 한 승려에 달렸노라.” - 88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국서를 지참하지 않았고, 귀국 시에도 일본의 국서가 없었지만 사명의 외교적 성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조선을 침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피로인들의 송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나라가 망한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선의 남녀가 끌려와 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니 모두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국내 세력의 내부 통합이 급선무인 새 권력자는 불승의 간곡한 호소에 응답한 형식으로 피로인들의 송환을 허락했다. 5월초 사명은 일본에 끌려갔던 동포를 배 48척에 나누어 태워 귀국하였다. - 90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18년 간 강진 생활은 인간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다산은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 고향으로 곧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끊고서 오로지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말하자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셈이었다.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작이 대부분 이곳에서 집필되었거나 구상되었다. 경전에 대한 방대한 주석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대표적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여기서 집필했고 『흠흠신서』의 얼개도 구상했다. 그는 ‘자찬 묘지명’에서 “내가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어언 20여 년 간 세상길에 빠져 다시 선왕의 대도(大道)를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여유가 생겼다”라고 하여 운명적으로 주어진 유배 생활을 창조적 분발의 계기로 삼았다. - 110쪽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중에서

 

유배 중 강진초당에서 한 편 한 편의 책을 탈고할 때마다 인편으로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형 약전에게 보였다. 그때마다 훈수를 할 만큼 약전의 학문 수준 또한 뛰어났다. 마침내 연구서 232권을 다 읽고 난 약전은 “네가 (신명이 통하고 저절로 깨닫게 되는) 이런 경지에 도달한 것은 너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도(道)를 잃어버린 지 천 년 동안 백 가지로 가리어 덮여 있었는데 이를 분해해서 확 열어 제꼈으니 어찌 너의 힘만으로 한 것이겠느냐”라며 극찬의 글을 써 보냈다. - 111쪽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중에서

 

다산 스스로 말하기를 “6경 4서로써 자기 마음과 몸을 닦게 하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그리고 『흠흠신서』, 곧 ‘1표 2서(一表二書)’로써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하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이 구비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

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天命)이 허락해 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여 불 속에 처넣어 불살라 태워버려도 좋다”라고 적었다.

수많은 저술에서 일관하는 다산의 생각은 무엇이었던가. 한마디로 ‘개혁’이 사상의 요체였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 사회의 해체기로서 누적된 봉건적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총체적 위기의 상황에서 그는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개혁밖에 없다고 깊이 통찰한 것이다. 그 시작은 모름지기 관료와 정치 지도자들의 마음과 몸가짐의 쇄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믿고, 구체적인 개혁 대안서인 『경세유표』의 완성에 이어 『목민심서』를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 116쪽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중에서

 

우정국에서 물러난 이상재는 낙향하여 시골에 있었는데 1887년 박정양의 요청으로 다시 상경하여 군 본부의 매우 낮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이 해 6월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박 공사의 추천으로 월남은 서기관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가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하루는 박 공사 일행이 행차하는데 워싱턴의 어린이들이 그 행렬을 뒤따라가며 돌멩이를 던지는 등 장난을 쳤다. 재래의 도포를 입고 행차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그 행차를 호위하던 미국 경찰은 돌멩이 던지는 아이들을 다 잡아서 경찰서에 보냈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월남이 워싱턴DC의 경찰서장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월남은 경찰서장에게 “어느 나라에서나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보면 돌을 던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것들을 잡아 가두면 되겠습니까? 즉시 석방하시오”라고 말했다. 어두워지면 경찰은 아이들을 부모들에게 다 돌려보내겠지만 체면상 잠시 잡아 가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남의 그런 요청을 들은 경찰뿐 아니라 시민들도 크게 감탄하였다. 그 날 저녁 워싱턴 신문 석간에 ‘Gentleman from Korea(한국에서 오신 신사)’라는 주제로 한국의 사절단을 칭찬하는 기사가 대서특필 되었다고 전해진다. - 132쪽 ‘아! 월남 이상재’ 중에서

 

박정양 공사의 미국 내에서의 활동은 크게 성공하였고 귀국한 일행은 고종의 마음을 매우 흐뭇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이홍장은 한국 정부의 외교 활동이 크게 성공한 사실에 분개하여 고종 황제를 못살게 굴었다. 고종은 견디다 못해 공사 박정양을 잠시 옥에 가두었는데 이는 이홍장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종은 월남을 불러서 그 노고를 치하하며 “이번에 수고가 많았어. 차제에 벼슬을 한 자리 하지”라고 하셨다. 월남 이상재가 고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가 모시고 갔던 어른은 죄를 입어 옥중에 있는데 모시고 갔던 놈이 벼슬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아뢰오”라고 말했다. 그 말에 감동한 고종이 “그럼 자네 아들이 있지 않나. 이번 기회에 벼슬을 한 자리 주면 어떨까”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은 월남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 아들놈이 배운 게 없어 시골서 농사나 짓고 있는 터에 벼슬이 웬 말이옵니까. 안 될 말씀인줄 아뢰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벼슬을 사양하고 어전을 물러나는 월남을 보고 고종 황제가 입속말처럼 “저런 신하만 있으면 나라가 되겠는데”라고 하셨다고 전해진다. 벼슬을 한 자리 주겠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거늘 그 벼슬자리를 끝까지 사양한 월남은 과연 위대한 한국인이었다. - 133쪽 ‘아! 월남 이상재’ 중에서

 

안중근은 “세계의 대세를 짐작하고 해외에서 ‘신호흡’을 하는 자 어찌 무모하게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 것인가. 이토의 정책이 동양 평화에 지대한 해를 끼치는 일임에 일신일가(一身一家)를 돌볼 여지가 없이 결행한 것”이라며, 의거의 명분과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이토와 개인적 원한이 없으며, 만약 개인적 원한으로 처단했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세계 대세를 짐작하는’ 그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한국 독립만이 아니라 이토의 조국인 일제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의거의 진실은 당장에 어렵다고 한다면 훗날에라도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 확신했다. - 149쪽 ‘안중근, 동양 평화를 외치다’ 중에서

 

이토를 실은 특별 열차는 오전 아홉 시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Kokovtsev)와 열차 안에서 30분 간 회담한 뒤 아홉 시 30분경 코코프체프의 선도로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사열을 마친 뒤 이토는 몇 걸음 되돌아서서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했다.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 후방에 있던 안중근은 이토가 자기 앞을 조금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온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이토를 조준해 브로닝 8연발 권총으로 네 발을 발사했다. 안중근과 이토의 거리는 10여 보에 불과했다. 세 발이 명중되었다. 그리고 안중근은 한국 말 대신 러시아 말로 ‘우레 꼬레아(대한국 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거사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려 함이었다. - 159쪽 ‘안중근, 동양 평화를 외치다’ 중에서

 

안중근의 사형 선고 소식은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통해 진남포에 있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에게도 전해졌다. 여사는 너무도 의연했다. 그리고 일필(一筆)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중략) 네가 만약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너라.” - 168쪽 ‘안중근, 동양 평화를 외치다’ 중에서

 

도산이 조선 땅에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운동에 참여하고 점진학교의 설립과 개간 사업으로 개화 자강 의식을 확립했다면, 미주에서 시작한 조직 사업은 패망의 길에 빠져든 조국을 실의에 찬 눈으로 응시할 뿐이던 동포들을 의식을 깨우쳐 내일을 기약하는 조직 운동의 모범을 보인 것이었다. 맨몸으로 건너와 조국을 구하는 준비 작업에 헌신한 우국 청년의 미주 체류 5년은 현대적인 조직과 민주적 운영 과정을 습득하여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 193쪽 ‘안창호, 무실역행의 통합적 지도자’ 중에서

 

1920년 1월 3일, 상하이 교포들을 상대로 한 ‘나라 사랑의 6대 사업’이라는 제목의 신년 강연에서 도산은 자신이 구상하는 새 나라의 면모, 이를테면 헌법의 골격을 밝혔다.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제정, 통일, 여섯 개 분야를 아우르는 총강의 대 전제가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는 정부와 인민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황제가 없습니까? 있습니다. 대한 나라의 과거에는 황제가 하나 밖에 없었지만 금일에는 2천만 국민이 다 황제입니다. 여러분이 앉은 자리는 다 옥좌이며, 머리에 쓴 것은 다 면류관이외다. 황제가 무엇입니까? 주권자입니다. 과거의 주권자는 하나뿐이었으나 지금은 여러분이다 주권자이외다.” - 195쪽 ‘안창호, 무실역행의 통합적 지도자’ 중에서

 

도산의 믿음은 ‘수양 즉 독립’이라는 근본 사상이다. 그는 독립 국가의 건설을 가옥의 건축에 비유했다. 기초 공사란 수양된 국민의 양성이고 정치적 제도와 행위는 상부 공사에 해당한다. 민족의 독립은 개개인의 ‘힘’을 바탕으로 통합된 민족 의지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민족의 힘은 민족 개인의 ‘무실역행’과 집단적 ‘대공(大公)주의’를 통해 실현 가능한 것이다. 독립할 능력을 갖춘 개인(신민)을 바탕으로, 국가 정체는 구한말의 체제와는 다른 공화제(신국)를 추구했다. 민족 쇠퇴의 원인을 극복하기 위한 기초로서 혁신된 개인과 이들을 통한 새로운 국가를 추구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개인 존재의 가치가 ‘거짓’됨이 없는 ‘신용’있는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 ‘인간 혁명’을 중시한 것이다. - 200쪽 ‘안창호, 무실역행의 통합적 지도자’ 중에서

 

도산 안창호는 자신의 이름으로 단행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산옹(山翁)’ 또는 ‘섬뫼(島山의 한글)’ 등 여러 필명으로 쓴 많은 기고문과 연설문 그리고 노랫말 가사가 남아 있다. 많은 당대인과 후세인이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를 썼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방과 국토의 분단, 그리고 두 개의 나라가 세워지면서 제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여러 독립 운동 지도자에 대한 후세인의 평가가 극도로 엇갈리는 데 비하면 도산 안창호는 적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영웅이다. - 205쪽 ‘안창호, 무실역행의 통합적 지도자’ 중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세운 어른이다. 상하이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초대, 2대, 3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가 아니라면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고, 심하게 폄훼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극심한 이념의 분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념의 갈등, 문명의 충돌, 또 종교를 내세운 전쟁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요즘의 대한민국처럼 이념으로 분열된 사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폄훼는 이 이념적 분열과 직결된다. 분단된 한반도의 비극이다. - 215쪽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중에서

 

이승만은 귀국 다음날의 연설에서 한인 사회의 분열을 개탄하면서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것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로 유행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한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독립이 우선’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사실 33년 간의 망명 생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고, 귀국 후의 그의 언행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 정치학자는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노력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첫째, 워싱턴 연락 사무소를 통한 활동이다. 당시 이승만을 위하여 로비에 앞장섰던 인물은 올리버(Robert Oliver)와 임병직(林炳稷)이다. 이들은 신문 투고 혹은 국무부에 글을 보냄으로써 미국 내의 여론 조성과 로비에 기여했다.

둘째, 1945년 12월 하순 미 ‧ 영 ‧ 소의 3상회의(모스크바)가 한국의 신탁 통치를 결정하자, 그 반대를 제일 먼저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이승만이다. 그는 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 38선 철폐, 신탁 통치 반대를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독촉을 통하여, 또 전국 유세를 통하여 반탁 세력을 규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셋째, 미국을 방문하여 직접 로비에 나서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초 미국으로 다시 갔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 정부를 직접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노력은 결국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케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 아래의 선거’를 통한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을 결의한다. - 223쪽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중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난 후의 이승만의 행동은 기민했다. 26일 새벽 세 시, 그는 도쿄에 이었던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전화했다. 한국의 위급 상황을 전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맥아더는 무기와 병력 지원을 약속했다. 이승만은 또 주미대사 장면(張勉)을 불렀다.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1천만 달러 무기 지원”을 독촉하여 받아내라고 지시했다. 이어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원조 호소 전문을 보냈다. 그리고 그 전문을 장면이 트루먼에게 직접 전달토록 명했다. 이러한 일련의 대미 조치가 신속하게 효력을 발휘했다. 미국 참전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트루먼은 해 ‧ 공군의 투입을 결정했다. 전쟁 발발 이틀 후였다. 이어 한국 문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되었다. 안보이사회의 결정으로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참전하였다. - 234쪽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중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약 2개월 후인 10월 1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의 정식 발효는 이듬 해 11월 18일이다. 이 조약은 대한민국 안보의 지킴이다. 현재도 그것은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또 튼튼한 안보가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된 것은 물론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 안보 외교의 승리였다. 정치적 결단의 진수(眞髓)였다. 아니 또 반공 포로의 석방은 이승만의 인도주의의 발현이었다. 공산 적치(赤治)로의 강제 송환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 238쪽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중에서

 

돌이켜보면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는 쾌거다. 가장 유쾌한 업적이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이승만이 선언했다하여 ‘이승만 라인’이라고도 하나, 인접 국가(주로 일본 그리고 중국)와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평화선’으로 불리는 해양 주권선이다. 평화선은 우리나라 해안선으로부터 평균 60마일이며, 이 수역에 존치하는 광물과 수산 자원의 보호가 선포의 일차적 목적이었다. 부차적으로는 어업 기술이 월등한 일본과의 어업 분쟁의 봉쇄 및 북한 공산 세력의 연안 침투 방지의 효과도 노렸다. 독도가 우리 영토에 포함된 것은 물론이나, 외국 선박의 공해상의 자유 항행권을 제한하려는 선언은 아니었다. 미국과 중남미 여러 나라의 해양 자원 보존 및 대륙붕 영해 확장이란 국제적 선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 243쪽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중에서

 

미군은 낙동강 기슭에다 전폭기를 대거 동원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융단폭격을 가했다. 그 사이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중, 어느 하루 제1사단 휘하 1개 대대가 북괴군에게 밀려 자칫 미27연대 측면이 뚫릴 위험에 처했다. 다급해진 미 연대장이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생각이 있느냐?”라고 힐난해왔다. 볼멘소리를 듣자마자 백선엽은 유학산 아래에 백병전이 계속되던 328고지 쪽으로 달려갔다. 밀려 내려오던 부하 장병을 모아 앉혔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아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그리고 백선엽은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빼들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11연대 1대대 장병들의 중간을 가르면서 달려 나갔다. 다급한 상황에서 몸소 보여 주었던 ‘사단장 돌격’이었다. - 260쪽 ‘6·25전쟁하면 생각나는 임, 백선엽’ 중에서

 

당초는 미1기병사단이 정공(正攻)으로 올라가고 미24사단이 우익을 맡아 역시 평양으로 진격할 작전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개성, 해주 등지를 공격해서 후방의 적을 소탕하도록 짜여졌다. 백선엽은 이 계획이 마뜩찮았다. 미군 지휘관에게 가서 “평양은 내 고향이고 나를 따르는 장병 또한 잃었던 땅을 찾는 노릇인데 거기에 앞장서지 못한다면 그 사기 저하는 어찌할 것인가?” 했다. 설득이 주효해서 미24사단 역할을 제1사단이 대신 맡았다. 진격의 속도를 더하기 위해 미군 전차 중대의 배속을 받았고, 미군 최초로 기갑 부대 지휘관이 되었으며 이후 기동전 신봉자가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George Patton, 1885∼1945) 장군처럼, 백선엽은 그 1호 선두 전차에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탔다. 또 한 번의 ‘사단장 돌격’이었다. - 263쪽 ‘6·25전쟁하면 생각나는 임, 백선엽’ 중에서

 

참모총장은 군사행정가 이상으로 군사정치가다. 특히 전쟁 중의 참모총장은 군 내부의 리더십은 물론 국내 정국(政局)에 대한 감각 그리고 국제전에 참전한 원정군 특히 미군을 상대해야 하는 대외 정국 등 하나같이 비상한 과제를 다뤄야 했다. 무엇보다 미군을 상대해야 하는 정치가 중차대 현안이었다. 미군의 각종 도움을 받아 당장은 혈전에서 이겨야 했고, 장차는 국군 현대화를 이뤄야 했기 때문이었다. 건국 직후 대한민국이 구상했던, 총 병력 6만5천 명 한도의 5개 사단 확보 계획은 6·25전쟁 발발로 물거품이 되고난 뒤 전쟁을 치르면서 다시 분발한 목표는 25만 병력의 10개 사단이었다. 병력 살림이 그렇게 늘어난다면 거기에 따른 각종 군사 인프라며 보급 체계 등 이전에 전혀 겪지 못했던 일이 산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미군의 적극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여기에 미군과 가장 소통이 잘 되는 백선엽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 280쪽 ‘6·25전쟁하면 생각나는 임, 백선엽’ 중에서

 

정전을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어떻게든 열전을 종식시키려는 미국 대외 정책 사이에서 백선엽은 그 대치 간격을 줄이면서 나라 안보를 지키려고 고심, 또 고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전쟁 종식 방도를 직접 모색하려고 1951년 말에 방한했을 때 당선자는 이승만 만나기를 주저했다. 그런데 백선엽이 직접 설득해서 면담을 성사시켰다. 미국 정부가 여러 요구 사항을 직접 말하려했음인지 백선엽을 미국으로 초치했을 때는 전장에서 친했던 미 해군 장성이 한밤중에 숙소로 찾아와서 한국 안보를 위해 여러 모로 조언해주었다. 제안이 그럴싸해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직접 만나보려 했다. 프로토콜(외교 의례)로는 약소국 참모총장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미국 군인이 매일 2백 명씩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16개 사단을 거느린 국군 지휘관임을 내세워 만남을 성사시켰다. 그 자리에서 미군이 참전해서 손을 떼고 난 뒤에도 한국의 안보를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약조를 시사 받았다. - 282쪽 ‘6·25전쟁하면 생각나는 임, 백선엽’ 중에서

 

현봉학은 흥남 부두에 몰려온 피란민의 운명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그들을 구출할 방도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10만여 명에 달하는 피란민을 육로로 흥남에서 원산을 거쳐 남쪽으로 피란시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비행기로 공수하기에도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현봉학은 고심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뱃길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짓고는 김백일(金白一, 1917∼1951) 육군 제1군단장과 함께 아몬드 사령관을 찾아갔다. 간절한 마음으로 해군 수송선을 이용해 피란민을 남쪽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김 장군은 “우리 1군단은 배를 타지 않고 육로로 중공군을 무찌르면서 남하할 테니 그 대신 피란민을 태워 달라!”라고까지 말했다.

이들의 제안을 들은 아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헛된 ‘망상’ 쯤으로 치부하며 냉정하고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사령관으로선 피란민보다 흥남 부두로 몰려온 유엔군(주로 미군과 한국군) 약 10만 명과 많은 군수 물자를 후송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긴박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현봉학은 물러나지 않았다. 피란민을 살려달라고 끈질기게 애원했다. 적지 흥남에 남겨두면 피란민은 공산군에 의해 모두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계속 설득했다. - 299쪽 ‘전쟁터에서 꽃피운 인간 사랑 닥터 현봉학’ 중에서

 

“나를 두고 ‘흥남 대탈출의 장본인’, ‘흥남 철수의 영웅’이라고 하는데, 그런 수식어를 들을 때면 인간사의 다른 쪽을 보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나는 흥남 철수로 인해 수백 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니까요.”

그러곤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라 내가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인간 내면의 깊은 모습을 보지 못한 내 ‘단견’에 민망함을 느꼈다. 아울러 ‘영웅’이 아닌 우리 시대의 올바르고 진정한 휴머니스트로서 현봉학 박사의 참모습을 본 듯해서 한편으론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 308쪽 ‘전쟁터에서 꽃피운 인간 사랑 닥터 현봉학’ 중에서

 

그 많은 분야에서 논의된 박태준의 매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가 ‘선비’라는 점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선비이고 가장 모범적인 선비다. 그는 개발 시대, 산업화 시대 선비의 전형(典型)이다. 일상의 생활이며 사고이며 지향이며 그리고 일체의 행동거지에서 그는 누구에게나 지표가 되는 선비다. 잇달아 논의될 그의 사상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선비 사상’이다. - 316쪽 ‘선비의 전형 박태준’ 중에서

 

박태준의 굳은 뜻과 굳센 의지는 시간이 흘러도 누그러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그 의지의 굳셈은 그가 생산해내는 강철과도 같았고 그 의지의 불꽃은 그가 불붙인 용광로 불꽃과 다름없었다. 마침내 일본 재계의 지도자 야스히로 도스구니[八尋俊邦]가 말했다.

“누를 수 없는 용광로 같은 뜨거운 조국애로 그는 대사업을 이룩했다.”

박태준은 누를 수 없는 굳센 의지를 가졌고, 그 의지는 용광로처럼 뜨거웠고, 그 뜨거움은 조국애의 발로였다. 박태준은 참으로 뜻의 선비였고 의지의 선비였다. 굳센 의지 없이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성취를 진실로 그는 성취했다. 선비는 의지만으로는 빛나지 않는다. 선비의 뜻과 의지가 성취로 이어질 때 비로소 선비 사상은 형성된다. 박태준 의지의 위대성이 거기에 있다. - 321쪽 ‘선비의 전형 박태준’ 중에서

 

박태준은 선조들의 대의를 잊지 않았다.

“포항제철은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이룩되는 민족 기업이다. 선조들의 핏값으로 짓는 공장이 바로 이 포항제철이다. 이 기업에 실패하면 우리는 선조들에 죄인이 된다. 지금 현장사무소 오른쪽에 영일만이 있다. 우향우해서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우향우’는 포철인(Posco-man)들의 가슴을 때리는 슬로건이고, 그들의 사명감을 불태우는 구호였다. 그것은 오직 대의를 위해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의’ 그 자체였다. - 324쪽 ‘선비의 전형 박태준’ 중에서

 

꼭 한 분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다면 그 분은 신천옹(信天翁) - ‘바보새’ - 함석헌 선생이시다.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나는 이미 그 성함을 알고 있었는데, 함 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던 연세대 영문과 고병려(高秉呂) 교수 덕분에 이 어른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뵀을 때 이 어른의 나이는 48세였다. 1901년생이어서 선생의 나이는 서력 기원과 함께 숫자를 더 하였기 때문에 기억하기 매우 쉬었다. 처음 뵙고 나는 당장에 이 어른의 매력에 빠졌다. 무궁무진한 학식, 탁월한 말솜씨, 의연하면서도 예술적인 용모 - 이 모든 것이 스물한 살의 젊은 나를 매료하였다. - 341쪽 ‘나의 스승 함석헌’ 중에서

 

그때 분연히 일어난 사람은 나의 스승 함석헌이었다. 중국 고전에 능통한 선생은 ‘군(軍)’은 불상지기(不祥之器)라고 외치고 앞장서셨다.

“민주적 헌법이 존재하는 민주적 국가에서 어쩌자고 군인이 정권을 잡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선생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국민의 신망이 두텁고 이미 나이 60이 넘은 한 시대의 이름 있는 어른을 군사 정권도 함부로 다를 수는 없었다. 김종필이 나의 스승을 두고 “정신없는 늙은이”라고 비하했던 일이 기억난다. - 345쪽 ‘나의 스승 함석헌’ 중에서

 

1971년 성탄절 때 TV로 전국에 생중계 방송된 미사 강론에서 추기경은 옷소매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 연장 의도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권력이 있는데 그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추기경은 그날 밤 작심한 듯 말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나 이웃 사랑 실천 같은, 판에 박은 듯한 소리에만 익숙했던 많은 국민은 깜짝 놀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356쪽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중에서

 

1987년 ‘6·10항쟁’ 때 명동대성당 구역 안에서 농성 중인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찾아온 이는 가톨릭 신자였던 이상연(李相淵, 1936- ) 내무부 장관. 그때 김수환 추기경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리고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농성 학생들은 그 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고……” - 362쪽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중에서

 

2005년 4월, 바티칸에서 엄수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에 우리 정부 공식 조문 사절로 내가 참석했을 때, 우리나라의 김 추기경이 나중에 베네딕트 16세 교황이 되신 당시 교황청 국무장관 라칭거(Joseph Ratzinger) 추기경과 둘이서 그 엄숙한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진행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너무 감격스런 나머지 남몰래 눈물까지 흘렸다.

그 전날까지 김 추기경은 소화불량, 피로, 설사로 밤잠을 제대로 못자고 고생했다. 아침결에 찾아온 독일계 여의사가 농담을 했다.

“추기경님,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하고는 절친한 사이 아닙니까? 뭐 좀 아프다고 저 같은 의사를 부르세요? 저 베드로 광장에서 울려퍼지는 함성 안 들리세요? 빨리 성인으로, 빨리 성인으로! 아마 지금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인품에 올라가셨을 테니 친구 분인 그 교황님께 한 마디 부탁만 하시면 이런 별것도 아닌 병은 금방 치유되실 텐데……”

그 말에 김수환 추기경은 박장대소했다. 그날 장례 절차는 아주 엄숙하고 깔끔하게 잘 치러졌다. 온 세계는 생중계 방송된 행사를 빠짐없이 시청했다.

나는 우리 추기경이 그렇게 높은 분인 줄 몰랐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나중에 교황 품을 계승한 베네딕트 16세와 함께 추기경 서열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추기경 가운데서 두 번째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 364쪽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중에서

 

간송은 이처럼 재단 운영과 학교 운영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하지만 학교 행사인 삼일절 기념식은 반드시 참석해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간송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어떤 모임에서든 남 앞에 나서는 걸 멀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성품임에도 유독 삼일절 독립선언문 낭독만큼은 마다하지 않고 직접 했으니 그 깊은 속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간송의 유품 중에는 친필로 쓴 독립선언문도 있다. 이 독립선언문을 보노라면 그의 민족 사랑과 민중의 뜨거운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아울러 삼일절 행사 때마다 학생들 앞에서 절절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간송의 뜻이 조용한 여운(餘韻)으로 전해온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간송이 느꼈던 굴욕적인 민족적 한(恨)이 얼마나 컸을지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일제강점기에 가산(家産)을 기울여, 아니 탕진하다시피 하면서까지 우리 문화 예술품을 ‘보전 보호’하는 데 모든 것을 건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382쪽 ‘문화 독립 운동가 전형필’ 중에서

 

내가 보성고교 학생 시절에 이훈종(李勳鐘, 1918~2005) 국어 교사에게서 들었던 바로, 간송은 호리다시[掘出]꾼들이 어쩌다 진품이 아닌 것을 가져와도 그 값을 후하게 쳐주었다 했다. 만약 ‘정품’이 아니라고 호리다시들을 나무라면 그들이 진품마저 가져오지 않을 뿐더러 간송과의 인연도 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미술품의 원주인이 그 가치를 모르고 싼값을 부르더라도 두 배, 세 배 또는 열 배로 제값을 쳐줬다는 훈훈한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 일화였다. 간송에 대한 이런 입소문이 고미술품계에서 전설처럼 퍼져나간 것은 당연했다. 아울러 간송의 푸근하고 진솔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런 소문 덕분에 그때 중요 골동품이 매물로 시중에 나왔다 하면 먼저 간송에게 ‘몰려오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 389쪽 ‘문화 독립 운동가 전형필’ 중에서

 

도쿄에 살면서 고려청자만을 수십 년간 고집스럽게 수집해온 영국 변호사 개스비(John Gadsby)가 동북아시아에 몰려오는 전운(戰雲) 때문에 일본을 떠나 귀국하려 하자 간송이 그의 수장품을 모두 인수한 것이다. 1937년에 인수한 품목 중에는 훗날 국보로 지정된 것이 4종, 보물로 지정된 것이 3종에 달했다. 그 밖에 접시, 대접, 사발, 유병(油餠), 향합(香盒) 등 다양한 기종(器種)이 있었으니 영국 외교관의 안목이 절로 감탄스러웠다. 그런 그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수집한 애장품의 우선 인수자로 간송을 꼽았다는 것 역시 참으로 예사스럽지 않았다. 그때 간송의 명성이 그만큼 높았으며, 믿을 수 있는 문화 애호가로 우뚝 섰다는 말이었다. - 391쪽 ‘문화 독립 운동가 전형필’ 중에서

 

한 장 적자면 파지 넉 장이 나오는 2백자 원고지로 장장 3만1천여 장, 책으로 무려 20권 분량이다. 1971년에 유방암 수술을 받고 붕대로 수술 자리를 동여매고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던, 등장 인물만 800여 명인 ‘문학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자 각계의 찬사가 잇따랐다. - 410쪽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 문학’ 중에서

 

“끝났다는 생각이 안 든다. 글은 내가 살아온 자취일 뿐이고 살아가듯이 글을 썼을 뿐인데 이처럼 축하받을 일인가 싶어 당황스럽다. 잔치 상을 받고 보니 벌 받을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이 행사를 당초 반대한 처지에서 마땅히 청해야 할 사람도 챙기지 못했다. 이름도 없이 간단히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만 엽서에 적어 부담을 주지 않으려던 애독자들에게 답장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슬프다. 모두가 어쩐지 슬프다.”

잔치판 하객들은 하나같이 이처럼 기쁜 날이 없다고 하는데 작가는 슬프다 했다. ‘희비쌍곡’이란 말도 이 경우를 예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니겠나?”라고 소설(『토지』 5부)에서 뿐만 아니라 작가가 여기저기에서 여러 번 토로한

적 있었다. - 414쪽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 문학’ 중에서

 

위로 받은 것 못지않게 작가와 인연이 있는 사람 치고 원주에서 밥 한 끼 얻어먹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꾸려가는 생활에서 언제부터인가 하루에 두 끼 밖에 먹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된 내방객이 도착하면 때맞추어 식사를 준비한다. 신식 요리를 배운 솜씨는 아니었다. 서울 사람들이 겉절이라 부르는 배추 생김치나, 마당에 지천으로 자란 것을 거두어 담아 푹 곰삭힌 꼬들빼기 김치, 그리고 된장국 맛이 내 입맛에 범상하지 않았다. 식사 수발을 거드는 사람이 없는데도 굳이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우리 전통 시대의 미덕에 대한 애착이 그처럼 깊다는 말이었다.

작가의 집을 나서는 사람에겐 텃밭의 소출을 꼭 쥐어준다. 고추나 배추 또는 대추를 얻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요즘 시장에 나도는 유기농법 작물도 신뢰도가 들쑥날쑥이라지만, 작가가 가꾼 것은 “자식을 기르는” 정성의 산물이었다. 지력을 많이 소모한다며 고추 농사에 퇴비를 얼마나 부었는지 고추의 육질은 튼실하고 그 맛은 맵싸하면서도 달았다. - 418쪽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 문학’ 중에서

 

 

■ 차 례

 

·책을 펴내며: 꿈을 좇았던 한민족의 자존심

·편집자의 말: 한민족의 자부심을 한바탕 외치려는 책을 엮기까지

 

세종대왕, 한글을 창제하다 최정호

천 년의 인물, 이순신 김형국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안경환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김성훈

아! 월남 이상재 김동길

안중근, 동양 평화를 외치다 장석흥

안창호, 무실역행(務實力行)의 통합적 지도자 안경환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최 명

6·25전쟁 하면 생각나는 임, 백선엽 김형국

전쟁터에서 꽃피운 인간 사랑 닥터 현봉학 이성낙

선비의 전형 박태준 송 복

나의 스승 함석헌 김동길

김수환 추기경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봉두완

문화 독립 운동가 전형필 이성낙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 문학 김형국

 

 

저자 소개

  


김동길(金東吉)

1928년 평남 맹산 출생. 연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반스빌 대학교 역사학과를 거쳐 보스턴 대학교에서 링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교수, 부총장, 조선일보 논설고문, 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거쳐, 현재는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명예 이사장이다. 『링컨의 일생』 등 80여 권의 저서를 냈다.

 

김성훈(金成勳)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학교 농대를 졸업했고,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학교 부총장, 제50대 농림부 장관, 상지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다. 나라 안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공동 대표를, 나라 밖에서 UN/FAO(태국, 방콕)의 아태농업금융기구 사무총장을 지냈다. 현재 중앙대학교 명예교수이다.

 

김형국(金炯國)

1942년 경남 마산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에서 도시계획학(박사)을 공부했다. 한때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이었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로 정년 퇴임했다. 이후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가나문화재단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봉두완(奉斗玩)

1935년 황해도 수안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신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동화통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동양방송 논평위원을 역임했고 정계에 투신하여 11대 ‧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2년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통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천주교 한민족돕기회 회장이다.

 

송복(宋復)

1938년 경남 김해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사상계』 기자로 있다가 하와이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정년 퇴임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인연을 적은 『위대한 만남』,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강조한 『특혜와 책임』이 시중의 화제가 되었던 저술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안경환(安京煥)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펜실베니아 법학 대학원을 거쳐 산타클라라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로 있었고 재직 중에 법대 학장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이성낙(李成洛)

1938년 서울 출생. 서울 보성고와 독일 마르부르크 의과대학 졸업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피부과 교수, 연세대학교 의대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퇴임 후 명지대학교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현봉학 박사를 추모하는 모임 회장이다.

 

장석흥(張錫興)

1956년 충남 공주 출생.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사학회장 등을 지내고 현재 모교 국사학과 교수이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다.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6․10만세운동』등의 저서를 냈다.

 

최명(崔明)

1940년생.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정년 퇴임했다. 『중국현대정치사상사』, 『소설이 아닌 삼국지』, 『소설이 아닌 임꺽정전』을 펴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최정호(崔禎鎬)

1933년 전북 전주 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고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동아 ‧ 조선 ‧ 중앙 등의 중앙 언론에서 논설위원을 지냈고, 성균관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역임했다. 제2대 한국미래학회 학회장을 지냈고 2006년 독일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인문학, 언론학 계통의 수많은 저서를 냈다. 현재 울산대학교 석좌교수이다.